오디오에어로 ‘카피톨레’의 월간지 원고를 작성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었다. 마치 10주년을 기념이라도 하듯, 오디오에어로의 신제품 하나가 날아왔다(비행체를 모사한 건 이 회사 제품들의 컨셉이라는 생각이다). 예전의 모습이 여객기나 수송기였다면, 현재는 전투기나 폭격기처럼 다부져서 세련되었지만 뭔가 저돌적인 분위기마저 감돈다. 이리저리 변모한 모습이 다소 낯설어 보이긴 하지만, 이 프랑스산 플레이어는 필자에게 안도의 감회를 선사해주었다. 제품의 우수성과 무관하게 중원에서 사라져간 브랜드들이 많았기에, 개인적으로 오디오에어로의 건재를 확인하는 순간에는 각별한 감흥이 있다. 
 
2000년 초반 디지털 플레이어의 상황은 사실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마치 골인 지점을 지나고도 여전히 달려야 하는 마라톤 주자처럼 상대의 눈치를 보며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긴 장정이 이미 2막, 3막으로 넘어갔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CD 포맷의 반경 내에 주도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SACD는 그다지 확신에 차 있지 않은 채 일단 대중화를 재촉하고 있었고, CD는 제 자리를 맴돌며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일관성이 없이 제각기 안 뒤집어 본 돌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예컨대 디지털 플레이어의 맹주 와디아는 몽실몽실해진 새 픽업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고, 메리디언은 별안간 DVD 드라이브를 채용한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으며, 크렐은 그 다음 제품을 놓고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국내 제작 플레이어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생경한 프랑스 국적기 ‘오디오에어로’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한 데가 있었다. 일단 모양새에서는 뭔가 확신을 준다거나 판을 뒤엎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획기적인 분위기는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원숙한 사운드는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에 따른 포트폴리오로 이어질 기회를 마련했다. 이 뜻하지 않은 플레이어를 보며 그렇게 얘기했다. CD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들어도 되겠구나…

최근에 생긴 일이긴 하지만, 그 10년 사이의 가장 큰 변화는 플래그쉽이었던 카피톨레 시리즈의 상급 카테고리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될 것 같다. 그것은 SACD의 부산물로서가 아닌, CD 재생을 본연의 기능으로 하는 SACD/CD 플레이 기능, 그리고 전 라인업에 걸쳐 픽업 메커니즘이 트레이식으로 대이동 하게 된 것 등이다. 여하튼 이런 현상의 결과로서 최상위에 ‘라 소스(La Source)’가 자리잡게 되었고, 그 바로 아래 ‘라 퐁텐(La Fontaine)’이 위치하게 되었다. 카피톨레는 레퍼런스 모델을 끝으로 어쩌면 이후의 버전을 기약 못할 지도 모르겠다.

 

 

 

처음 카피톨레가 출시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라 소스’ 및 ‘라 퐁텐’은 모두 프리앰프 내장형 SACD/CD 플레이어이다. 그래서 자사에서도 통칭 ‘뮤직센터’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거의 쌍둥이처럼 생긴 ‘라 소스’와는 의식적인 디자인 변화를 두고자 고심을 많이 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라 퐁텐’으로의 변화를 살펴보면 약간 키가 작아져 있고, 패널창의 모양이 반듯한 직사각형으로 바뀌었으며, 좌우대칭으로 각기 5개씩 배치한 버튼은 상하를 바꾸어 위에서부터 3열-2열의 역순으로 배열시켰다. 부수적인 것까지 열거하자면, ‘라 소스’는 상판에 마치 공기의 가이드로드처럼 전후 방향의 물결모양을 새겨놓았던 것에 비해, ‘라 퐁텐’은 마치 앰프의 방열판처럼 좌우의 측면을 가이드로 물결이 나 있다.

 

이런 금속 가공을 통해 미세한 그라데이션을 처리한 흔적을 본다면 이것은 일종의 금속공예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수려하고 정밀한 디자인 아래로 내려가 보면 견고한 빌딩설계와 더불어 아낌없는 물량투입이 사운드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본 제품의 바닥은 강철을 사용하고 있고, 섀시는 5mm 두께의 아노다이징 처리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었다. 섀시의 안과 밖은 분리되어 있어서 바닥진동 뿐 아니라 외부의 가벼운 직접접촉은 섀시 내부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내부기판은 24K 금도금 처리되어 있으며, 회로는 70ppm의 동으로 구성했다.

 

 

‘라 소스’와 ‘라 퐁텐’이 쌍둥이 같다는 인상을 갖는 건 곳곳에서 유사한 구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면패널의 왼쪽에는 소스와 볼륨 콘트롤, 오른쪽에 트랙 콘트롤을 두고 있는 점도 동일하고, 뒷 패널의 구성도 동일하다. 유일하게 ‘라 퐁텐’에만 채용한 네트워크 콘트롤 입력단인 RS232 부분만이 다르다. 전반적인 인상에서 ‘라 소스’가 투우와 같은 강열함이라고 한다면, ‘라 퐁텐’은 날렵한 세련미로 정의된다.

본 오디오에어로의 플레이어가 사운드적으로 특별한 것은 ‘카피톨레’ 이래 채용되어 온 자사고유의 프로세싱 방식인 STARS(Solution For Time Abstraction Resampling)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잘 알려진 바, 스위스의 아나그램사에서 설계한 프로세서를 탑재한 모듈은 ‘라 소스’와 ‘라 퐁텐’에 이르러 32비트-384KHz까지 확장되어있다. 본 프로세서는 우선, 버브라운사의 최상급 DAC인 PCM1792를 사용해서 DSD를 PCM 변환시킨 PCM 데이터를 오리지널 PCM과 동시에 32비트/384kHz로 리샘플링한다. 이 과정에서 DSS 싱크로나이징 방식의 초정밀 클락 제너레이팅을 적용, 극단의 지터 저감을 가능케 했다. 이런 고유의 프로세싱 방식의 결합으로 현재로서는 최상급의 디지털-아날로그 변환을 이룩했다.

 

 

 

트레이식으로 변경된 픽업 메커니즘은 필립스 대신 에소테릭 UMK-5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외모는 물론이고 사운드품질의 어딘가에 에소테릭의 응집력이 더해진 듯한 인상도 갖게 했다. 알루미늄 아노다이징 처리된 고급스런 트레이의 최대장점은 역시 대단히 정숙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입력단 또한 전방향에 걸쳐 뛰어난 대응력을 갖추어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프리앰프부의 심장이라면 역시 ‘카피톨레’ 이래 고유의 사운드를 구성하는 주요인자로서, 진공관을 출력버퍼단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라 퐁텐’은 극저온 처리된 필립스의 2021W 미니 쌍삼극관을 채널별로 듀얼 구성해서 기판에 직접 장착시켰다. SACD/CD 플레이어, 고유의 디지털 프로세싱, 그리고 프리앰프단 등 워낙 구석구석 설명이 많이 필요한 제품이라서 얘기가 끝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쯤에서 물리적인 설명을 마감하고 사운드에 대한 부분으로 옮겨가기로 한다.
 
원래 ‘카피톨레’에서 필자가 감명을 받았던 부분은 자사가 표방한 바 ‘SACD의 음질구현’을 놓고 가감을 하지 않은 그대로를 공감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DSD 컨버팅 방식의 장점을 레드북 CD와 접합시켰던 상황이야말로 오디오에어로를 급상승시키게 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출력단에 진공관을 사용해서 생겨난 적당한 포만감과 풍윤한 느낌, 그러면서도 호쾌한 드라이빙 등이 카피톨레의 핵심이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진화를 한 상황에서도 이런 고유의 성향이 ‘라 퐁텐’에도 잘 계승되어 있다는 점에서 감동이 일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정명훈 지휘의 ‘미사탱고’는 ‘라 퐁텐’의 사운드를 일괄하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단히 정숙한 배경 속에서 정밀하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일종의 온기 있는 생명력이 전해진다. 음의 입자감이 대단히 곱게 피어오르고 내려서 마치 정밀한 점들로 이어진 건장한 체구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무대에는 여럿이 자리잡고 있지만, 말단의 움직임까지 매우 사실적이고 장소와 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유연한 일체감으로 다가온다. 무대의 온도까지도 전해지는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력이다. 그러면서도 전면에 노골적으로 나서는 무언가의 느낌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래서 자연스럽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의 현악합주에서는 표정이 살아 숨쉰다. 보정을 하지 않아 발색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을 주지 않는 사진의 느낌처럼 한없이 섬세하다. 명쾌한 스테이징 속에서, ‘미사탱고’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단정하고 간격이 잘 맞춰진 대열이 그려지면서도 어느 순간에서도 결코 스피커 앞쪽으로 나서는 경우가 없다. 통제된 자연스러움이라고나 할까? 디지털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중의 하나라고 느꼈다.

 

한편으로, ‘라 퐁텐’은 유려함과 미학적인 접근을 기저로 하고 있으면서 이 플레이어의 새로운 지평이라 할 수 있는 단호한 재생을 무기로 하고 있다. 폴 아웃 보이의 ‘Thanks for a Memory’를 들어보면 뛰어난 응집력을 기반으로 절묘한 다이나믹 변화포착을 엿볼 수 있는 곡이다. 순간순간의 강렬한 비트가 살아 숨쉬며 스피디하면서도 분명한 절도가 있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마치 다리가 긴 메시가 문전을 쇄도하는 장면을 보는 듯 하다. 전반적으로 호쾌한 다이나믹 속에 풍부한 표정이 살아있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폴리니의 베토벤 소나타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뛰어난 해상도가 자연스러운 재생으로 이어지는 전형이라는 생각이다. 권위감있고 전 구간에 걸쳐 울림이 명쾌해서 유쾌한 시청이 되었다. 음영의 변화포착이 선명해서 컨트라스트가 잘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밝다.

10년 만에 만난 오디오에어로는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해주었다. 좀더 많은 세상을 경험한 친구를 만나서 듣는 얘기랄까? 그 뛰어난 완숙미 이면에는 다양성이 더해져 있고 그러면서도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는다. 필자에게 결핍된 다른 세상의 얘기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른 제품이 된 것이 아니라 여전한 오디오에어로의 정신이 면면히 핵심에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1000만원 정도를 호가하던 ‘캐피톨레’를 처음 봤을 때의 가격도 놀라움이었다. 프리앰프가 내장된 훌륭한 컨셉까지 일체화된 ‘라 퐁텐’은 최근의 멀티, 하이엔드 플레이어들의 가격을 감안하면 그다지 물리적으로도 멀리 있는 가격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최근 확장일로에 있는 파일저장-재생 방식 시스템의 편리성 혹은 흥미성에 의해 기존의 CD 진영은 뭔가 뒷전으로 가리워져 있는 듯한 인상을 받지만, 이런 모범적인 CD 플레이어의 등장이야말로 레퍼런스적인 의미를 환기시켜준다고 하겠다. 흔한 얘기지만, 다른 걸 잊고 음악에 빠져들 수 있는 이 가격대의 베스트 플레이어가 또 하나 출현했다.